미주재단 기부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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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자 | 김성열(치대 61) 동문의 남다른 기부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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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2023-01-09 10:04 조회86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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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 모교에 1백만달러를 기부한 와싱턴주 밴쿠버 동문 김성열 치과의사(치대 63입학) 자전적인 아름다운 기부스토리를 2회에 걸쳐 게재합니다.

 

“큰 거를 친구에 주거라” 어머님 말씀이 평생의‘ 좌우명’

 

모교 치과학술연구기금으로 100만 달러 기부

 

 

 

기부 동기 ‘세금 되갚으려고’

 제가 치과대학 다닐 때 서무실에 일이있어서 갔는데 사무직원이 숫자가 가득한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궁금해서 뭐냐고 물었더니 내년 예산이라고 하며 보여주었습니다. 거기에는 치과대학생 한사람에게 들어가는 비용이 있었는데 내가 내는 등록금으로는 어림도 없는액수였습니다“. 그게 다 국민들이 낸 세금에서 나오는거지요.” 그래서 그 때 생각했습니다. 내가 여유가 있으면 갚아야겠다. 이제 때가 되어 갚는 것입니다.

 

“큰 거를 주어라”

 제가 어렸을 때 이야기입니다.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 서너살 때 일입니다. 외할아버지가 가끔씩 저희 집에 오실 때면깨엿가락을 사가지고 오셔서 한가락씩저희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러면나는 깨엿을 들고 밖으로 뛰어 나가서 친구들 앞에서 자랑하면서 먹으면서 조금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하루는 깨엿을 들고 나갔는데 나하고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왔습니다. 그래서 반으로 뚝 잘랐는데, 똑 같이 자르려했지만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았습니다. 그래서 작은 것을 친구에게 주는데 마침 우리 어머니가 옆을 지나가다가 말씀하셨습니다. 

 “큰 거를 친구에 주어야지.” 망설였습니다. 큰거를 내가 먹어야 할텐데 하고. 그래도 어머니 말씀이니 들어야지.큰 거를친구에게 주었습니다. 그 후로는 항상 큰거를 친구들에게 주었습니다.

 친구들이 세명 네명일 때는 토막토막잘라서 큰것들 친구들을 주고 제일 작은것을 내가 먹었습니다. 당연히 그런 걸로여기며 나누며 살게 됐습니다.

 

대학시절 빈민촌 진료

 치과대학 다닐 때 매 주말 토요일에 서울 근교의 빈민촌을 다니며 무료 진료를 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학기말시험 때나 한결같이 판자촌 천막촌 빈민촌에 진료를 나갔습니다.

 이 모든 일을 밥먹듯이, 학교에 가듯이, 등산가서 산에 오르듯이, 으레 할일로 했습니다. 예상치 않았었는데 이 무료진료를 하면서 쌓아온 경험이 나중에 저에게는 연고가 없는 미국에서 개인 치과를 시작하고 운영하는데 자신감을 갖고 일할 수 있게 됐고 또 성공적으로 병원을 이끌 수 있었습니다. 

 

기부의 생활화 

 미국으로 이주해서도 남에게 베푸는 생활을 하는데 노력했습니다. 저희가 사는 오레건주 포틀랜드 지역에 한인 안식교회가 창립되었는데 성가대 가운이 없다고 해서 20벌을 기부했습니다. 

 밴쿠버 심포니 오케스트라 공연을 일년에 한번씩 스폰서했고 클라크 칼리지에 장학금, 메디칼 센터 대합실에 그랜드 피아노를, 암센터에 탈의실을 등등 지역사회 발전과 필요한 곳을 찾아 지원했습니다.

 꼭 돈이 많아서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보다 돈많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많습니다. 돈이 많으나 적으나 먹고 사는데 드는 돈은 거의 같습니다.

 돈은 써야 그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 저희 부부는 즐거움으로 했습니다. 감사했습니다.

 치과의사로서 매일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제한된 작은 공간인 입안에서 치아를 치료해야한다는 어려움을 느끼면서, 새로운 치과기구를 연구 발명해서 치과의사들은 좀 더 향상된 새로운 기구로 환자들을 편안하게 치료해주는 것을 저의 사명으로 삼게 됐습니다.

 새로운 기구를 10개 이상 발명해 실험을 통해 20개 이상의 특허를 받아 상품화해서 지금은 전세계 92개국에 공급돼치과의사들의 진료에 큰 도움을 주고, 환자들은 치료에 편안함을 누리는 혜택을 받게 됐습니다. 이것이 저에게는 가장 큰 보람이고 공적이라고 여겨집니다.

 또한 특허를 낸 치과기구들의 기업상품화로 들어온 이익금을 사회에 환원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새 치과기구 연구발명에 전념하면서 일주일에 3일은 환자진료,4일은 연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서강대 출신 아내의 축복

 제가 고3때 서강대학이 창립되었습니다. 그리고 소문이 났었습니다. 서강대학 나오면 외국유학 쉽게 갈 수 있다고.그래서 저희 동기중에 공부잘하는 우등생들이 서강대에 많이 들어갔습니다.

 서강에 다니는 친구들을 통해서 서강대가 공부를 잘시키고 특히 영어교육을 철저히 시킨다는 것을 알았는데 저는 그 서강대학의 좋은 교육을 받은 졸업생과 결혼을 했습니다.

 결국 아내를 통해 저는 서강대학의 좋은 교육 혜택을 받게된 것입니다. 저에게 행운이자 축복이었습니다. 미국 서북부 태평양 워싱턴주로 이주한 후 아내의유창한 영어로 미국생활에 빨리 적응하며 주류사회 진입에 큰 도움을 받게 된것입니다.

 한번은 서강대학교 교수인 정일우 신부님이 쓰신‘ 네 이웃을 하나님 같이 대하라’는 글을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그 글을 읽고 부터 제 아내가 하나님이며, 내아들딸 내 친구들 내 직원들이 하나님이며 내 환자들, 집 정원사, 도우미,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내 하나님처럼 대접하며 살고 있습니다 (편집자주: 그의 치과에서 환자들에게 설문(survey)조사를했는데 오랫동안 그의 환자였던 사람들이 그를 Honorable Man이라고 명시하기도 했다)

 

200명 중 3명이 합격한 치과면허

 1976년 미국에 이주해서 워싱턴주 치과면허시험을 보는데 10일동안 시험을 봤습니다. 기초과목 필기시험 이틀, 전문과목 필기시험 이틀, 실기시험 임상시험 모두 10일에 걸쳐서 시험을 봤습니다.

 그리고 합격했습니다. 당시 워싱턴주치과면허 시험에 응시한 외국인들이 200명이 넘었는데 3명이 합격했고 그중 하나가 저 였습니다.

 성적표를 받아보니 성적이 우수해 필기시험 해부학은 98점이었습니다. 모교 서울대 치대에서 받은 교육이 미국학생들에 뒤지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게 됐습니다.

 

서울대는 나눠야 할 축복

 서울대 치과대학은 저의 인생에 축복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살아오면서 어려운 일에 부딪히는 일이 많았습니다. 한장 종이도 맞들면 낫다는 신념으로 아내와 함께 둘이서 열심히 의논하면서 문제들을 해결해서 난관(misfortune)을 기회(opportunity)로 바꾸어 놓은 일이 여러번 있었습니다. 한가지를 놓고 남자가 보는 시각과 여자가 보는 시각이 다를 수도있어서 저는 아내의 의견을 물어 보고 해결점을 찾을 때도 많았습니다. 반대로 아내도 내 의견을 많이 듣습니다.

 이번 글을 준비하면서 제가 그리고 저희 부부가 아주 열심히 살아 왔구나, 행운을 우리가 받아드릴수 있게 준비를 하면서 열심히 살아왔구나, 그리고 우리가행운을 만들면서 살아왔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 행운을 마음껏 누리며 또한 이웃과도 함께 나누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좋은 교육 받고 자라온 내 서울대학교에 그리고 내가 내 가족을 이루고 살아온 내 지역사회에도 같이 나누어야 보람있는 삶을 사는 거라고 믿고실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삶의 실천을 위해 뜻을 세우라고 재학생들에게 권면 드리고 싶습니다.

 

멘토 교수님의 인도

 제가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인턴 레지던트를 마치고 군의관으로 갔다가 월남전에도 참전하고 제대했을 때 입니다. 연세대학교에 치과대학이 설립되면서 김귀선 교수님이 초대 학장을 맡게 됐습니다. 김귀선 교수님은 제가 서울대 치과대학에서 기독학생회 회장으로 일할때 지도교수였으며 저의 멘토 교수님이었습니다.

 제대하면서 김귀선 학장님께 인사하러 찾아갔더니“, 자네 여기와서 가르치지않겠나” 하셔서 “네, 하겠습니다” 하고는 일주일에 4시간 강의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얼마되지 않아 만나자는 전화를해 오셨습니다. 얼른 가서 뵈었더니“, 금호동에 있는 기독교병원에서 치과를 창설하고 치과과장을 찾는데 가보지 않겠나.” 그래서“ 네, 가 보겠습니다” 하고 가서 치과과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연초에 세배하러 학장님댁을 찾았을 때 사모님인 김정환 이사님말씀이 좋은 규수를 하나 발견했는데 만나보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저는 즉시“ 네, 소개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했습니다.

 사모님 말씀이 서울에서 국제여성대회가 있었는데 거기서 사회를 보던 미스전이 닥터 김한테 잘 어울릴 것 같다고하셨습니다. 미스 전에 대한 내 첫 인상은 키가 크고 서양화된 여자같은 인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좋은 옷을 입히면 보기 좋을거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아내가 이야기 한 것에 의하면 아내의 나에 대한 첫 인상은 시골에서 올라온 시골교회 온순한 목사같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공통점이 많았습니다. 나는 여섯 형제중에 둘째 아들이고 미스 전은 여섯딸중에 둘째딸이고, 3년 전에 아버님이 돌아가셨고, 우리는 둘 다 집안 살림을 맡은 가장이었고, 신앙이 같고, 생각이 많이 같았습니다. 그래서 대화가 계속되면서 친숙해 질 수 있었습니다.

 그후 우리는 거의 매일 퇴근후에 만나서 같이 저녁먹으면서 이야기하고 상도동 까지 바래다 주고 통행금지 시간이거의 되어서 신교동(지금은 청운동에 합침) 집에 돌아왔습니다. 서울시내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 택시 타며,뛰며 집에 돌아 왔습니다. 1월에 만나서 4월에 약혼하고 6월에 결혼했습니다. 그때가 병원에서 치과 과장으로 일하면서 연세대학교 치과대학에 강의 나갈 때였습니다.

 

“지는게 이기는 거다”

 역시 제가 어렸을때 이야기 입니다. 국민학교 1,2학년때 딱지치기를 많이 했는데 나이여하를 막론하고 많이 이겼습니다. 우리 동네에는 3,4학년 큰애들이 많았는데 모두들 나한테 잃었습니다.

 소문을 듣고는 이웃 동네 애들이 나한테 딱지치기 도전 하러왔습니다. 그리고 나한테 다 잃었습니다. 그랬더니 대여섯명 되는 삼사학년 애들이 나를 빙 둘러 싸고는 자기들이 잃은 딱지를 다 뺏어갔습니다.

 나는 분해서 울면서 집에 돌아와 집 앞 층계에 앉아서 울고 있는데 어머니가 나를 보고 웬일이냐고 묻고 아버지가 나와서 웬일이냐고 묻고는 하시는 말씀이“ 잊어버려라. 지는게 이기는거다.” 이제는 아버지한테 화를 냈습니다.

 “어떻게 지는게 이기는 거야” 가서 그 놈들을 붙잡아서 때려주고 내가 딴 딱지를다 뺏어 오지 않고“. 자, 들어가 저녁먹자.” 저는 평생을 지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싸움 한번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렇지만 항상 마음이 평화로웠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용서하는 삶이 이기는 거다.

 

고등학교 동기들의 기부

 서울대 동창회보를 통해서 알게된 우연한 일이지만, 서울대에 기부를 많이한 김성열, 이강홍, 주중광, 한홍택 (가나다순)이 경복고를 1960년에 졸업한 동기 동창들입니다.

 제 삶의 일부이지만 이렇게 이야기할수 있는 기회를 주신 미주 동창회에 감사드리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출처 : 서울대학교 미주동창회 미주동창회보 2022년 12월호